일반자료실

매일신문[八公山下] 팔공산을 天山으로 (지난기사 펌)

비로봉 2013. 1. 30. 10:47

 

 

 

팔공은 사방 수백 리에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정상에 서면 온 세상이 일망무제. 더 올려다 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다. 하늘과 만날 수 있는 통로, 하늘의 뜻을 물으려면 찾지 않을 수 없는 자리, 그것이 팔공산이다.

팔공산은 '우리'가 수 천년을 기대어 살아 온 산,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산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산,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산이다. 김유신은 거기서 핍박받던 나라 지킬 힘을 빌었다. 원효는 10년을 구도했다. 신라는 하늘에 올리는 국가적인 제사를 거기서 올렸다. 여러 유학자들은 수행처로 삼았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품안을 찾아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스님들이 그 날개 밑을 둥지 삼아 가부좌 틀고 동안거에 용맹정진 중이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우리 중생들의 마음들도 끊임 없이 쉼 없이 팔공산을 향하고 있다.

팔공산은 그 뭇 생명들을 그 오랜 시간 보듬어 왔다. 그들의 뜻과 고난을 지켜봐 줬다. 몽고군이 처절히 유린할 때는 민초들과 함께 아파했다. 왜군이 짓밟을 때는 의병을 감싸 안았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 공비들로 인해 마을이 화염에 휩싸이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처절함,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수십 호가 같은 날 제사를 모셔야 하게 됐던 참혹함에도 팔공산은 말없이 그 아픔을 함께 했다.

어디가 팔공인가. 늘 우리와 함께 있어 스스로 잘 아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막상 조금 예의 갖춰 자세히 보려 하자 윤곽조차 쉽게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았다. 제대로 파악해 설명해 주는 책 한 권 만나기 어려웠다.

답답해 산 위로 올랐으나 사방이 산첩첩, 어느 줄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서 맺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헬리콥터를 타 봐도 확연한 건 겨우 한 귀퉁이. 6km 상공에서 찍었다는 고공 사진, 심지어 지구 밖에서 찍었다는 위성사진으로도 팔공산은 제 모습을 다 보여 주지 않았다.

어디가 팔공인가, 그리고 그 품안에 사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두르는 법 없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경외심에 바탕한 겸허로써, 팔공을 찾아 또 '우리'를 찾아서, 여남은 달을 기약하고 길을 나선다.

팔공산을 공부해 보겠다고 지난 늦가을부터 이 능선 저 골짝 다녔다. 그러나 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모를 허연 것이 덮고 있었다. 사진 취재에 실패하는 날이 많았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따뜻해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안개는 산만 덮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팔공산의 지리를 제대로 안내해 줄 책을 만나기가 불가능했다. 산의 흐름이 어디로 이어지고, 권역이 어디까지이며, 표지가 될만한 봉우리들은 무엇 무엇인가를 알기 힘들었다.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답답해 국가의 지리 정보를 책임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들고 산에 올랐다. 그마저도 곳곳에서 오리무중이었다. 신뢰성 높아야 할 공공 보고서나 저술들의 서술도 서로 엇갈리기 일쑤였다. 앞선 서술을 너무 믿었었나, 아니면 팔공산을 가볍게 생각해 대충 베껴 때우려 했었나. 혼란들은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꼬리를 물고 뒤죽박죽 했다.

어디까지를 팔공산 권역으로 볼 것인지부터가 희미했다. 공식 보고서조차 그랬다. 4촌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영천의 화산(華山)까지 범위에 넣어 거기 있는 인각사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코앞의 환성산 덩어리는 잊고 있었다.

팔공산 넓이의 경우, 대구시 조사보고서가 3천700만여 평(122㎢)이라 하자 다른 여러 책들이 이를 덥석 받아 기정사실화 해 놨다. 기자도 덩달아 이 말에 속아 지냈다. 하나, 알고 보니 그것은 자연공원으로 지정된 면적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말들 속에 듣기 싫잖은 것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었다. 공원구역 면적만으로도 속리산 국립공원 면적의 2배나 된다고 했다. 새 행정수도 후보지(2천160만평) 보다도 훨씬 클 정도로 팔공산이 대단한 산이라는 말도 들었다.

주능선의 길이를 경북도 조사 보고서는 29km라 했다. 그러나 대구시 조사 보고서는 20km라고 했다. 파스칼 백과사전은 16km라 했다. 시점이 다르고 종점이 다른 모양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얼마라고 해야 할 것을 그냥 그렇게 때워 넘기고 있는 것이리라.

지도들의 표기는 혼란을 더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대 1 지도는 대구 무태의 서원연경 마을 뒷산을 '왕산'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같은 기관의 2만5천 지도는 지묘동 뒤 246m 산을 왕산이라 했다. 최근 발간돼 성가를 높인 '신산경표'라는 책도 그랬다. 지지(산경표)에서는 지묘동 뒷산, 지도(산경도)는 서원연경 마을 뒷산을 왕산이라 찍었다.

대구 도덕산에서 뻗어 나온 가지 줄기 중, 파계사 지구에서 지묘천골로 내려오다 봐 오른쪽에 우뚝 선 봉우리가 '응해산'이다. 하지만 국가 공식 2만5천 지도는 지묘천 건너 봉우리도 응해산이라 써 넣었다. 2만5천 지도가 중대동이라 표기한 파계사 지구 일대를 5만 지도는 '도남동'으로 적고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지명을 엉터리로 표기한 경우는 너무도 흔했다. 2만5천 지도는 동화사 양진암을 양전암(養殿庵)으로 한자까지 버젓이 바꿔 표기했다. 10만 지도는 신녕천을 신념천, 청통천을 정통천, 사창천을 사상천 혹은 사장천, 성전암은 성진암으로 썼다. 교정 잘못일 터.

한자를 잘못 읽어 사고를 낸 경우도 흔했다. 대구 백안동을 지나 와촌으로 가는 길의 왼편 산줄기 끝에 있는 명마산이 그랬다. 조마산으로 읽히더니 오마산으로까지 나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명(鳴)자가 조(鳥)로, 오(烏)로 왔다갔다해 버린 것이다. 부계(缶溪)는 악계(岳溪)로 예사롭게 읽혔다. 지묘천(智妙川)은 지사천(智沙川), 오계산(午鷄山)은 우계산(牛鷄山)이 돼 버리기도 했다.

산 높이 표기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팔공산 정상 봉우리가 5천 지도에서는 1192.8m였다가 2만5천 지도에서는 1192.9m로 높아졌다. 반면 파계봉 높이는 두 지도 사이에서 994m에서 991.2m로 낮아졌다. 팔공산 남면을 3등분하는 중심 줄기 중 하나인 거저산은 490m에서 520m까지 차가 났다.

혼란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국가 공식 지도는 관봉(갓바위봉) 옆의 봉우리 하나가 '인봉'이라고 지목했다. 그쯤에서 흘러내린 줄기의 중간에 바위덩이를 이고 솟아 있는 봉우리는 '노족봉'이라 기재하고 있었다. 그걸 보더니 현지 주민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지도가 노족봉이라 한 것이 인봉이라고 했다. 능선상의 그 봉우리에는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대구시의 팔공산 자연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만든 안내도도 한 가지는 지도를 따라, 한 가지는 주민들의 말을 따라 안내하고 있었다.

능선 중 한 지점은 '능성재'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 적잖았다. 지명 조사를 한 적 있는 사람들은 '너패재'가 옳다고 했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재 넘어 절 동네에 있는 안내판은 '능선재'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몸소 바로 잡겠다고 나섰던 것일까. 더욱이 팔공산 기슭을 따라 대구에서 경산 와촌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능성고개'라 불려 둘이 혼동되고 있었다. 어느 것이 '능성'이란 이름을 받는 게 더 타당할까?

팔공산 주봉의 이름을 놓고도 이견이 팽팽했다. 좌우에 동서봉을 거느려 '중봉'이라 불려 오다 '비로봉'으로 잡혀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비로봉도 아니라고 했다. '제왕봉'이라는 것이다. 국가 공식 지도는 주봉의 이름 표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신녕재'라 부르는 것의 옳은 이름은 '도마재'라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5천 지도도 이 이름을 택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했다. 비중이 매우 높은데도 아예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들이 적잖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엉뚱한 것으로 대신 호명하고 있었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 위치 표시용으로 세운 팻말에 적힌 일련번호가 호칭에 동원되고 있었다. "몇 번 봉우리" 하는 식이 그것이었다. 엉덩이로 타고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히프 봉우리"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다. 더 유식한 사람들이래야 겨우 "몇 m 고지"라고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냥 놔 둬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 따라 마구잡이 임의로 부르다 보면 봉우리들의 이름이 정말 그렇게 굳어져 버릴 판. 평생을 팔공산에서 살아 왔다는 김태락씨는 "지명 바로 잡을 기회조차 점차 사라져 간다"고 발을 굴렀다. 옛부터 전해 오던 봉우리와 재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대가 생을 마쳐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구시-경북도 주도로 하루 빨리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합니다. 어렵고 복잡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판국에서는 '팔공산하'도 지명 표기에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살얼음을 걷는 심정. 하지만 불가피한 부분에서는 과감히 새 표기를 도입하는 모험도 해 볼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집이든 드나들려면 먼저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 이번 일을 시작하면서도 이미 몇 곳을 돌았다. 팔공산 주인 중 하나라고 해야 할 불교 조계종의 일부 교구 본사에도 그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정작 산 자체에는 예의 차릴 길이 없었다.

그럴 즈음 연락이 왔다. "정상 '제천단'에서 '원단제'를 올리려 하니 동참하겠느냐." '달구벌 얼 찾는 모임'의 이정웅 회장이었다. 새해 첫날 팔공산 주봉에 올라 인사를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적지를 안내하는 등 진작부터 취재팀을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2005년 1월1일. 새벽 3시40분쯤 집을 나섰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였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쪽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4시30분. 길가에서 얼른 새벽 참을 챙겨 먹었다. 해맞이 객들로 길이 붐빌 것이라는 예고에 따라 군위 쪽으로 돌아 산의 북사면(北斜面)으로 차를 몰았다.

새벽 6시쯤. 어두워 잘 분별이 안 되는 중에도 긴장감은 높아졌다. 산이 높아질수록 쌓인 눈이 두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길이 얼어 있었다. 할 수 없어 차를 도중에 팽개쳤다. 걸어 올라가야 했다. 조금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 차를 버리니 하늘이 보였다. 날이 차가우니 달이 더 맑았다. 별이 성성했다. 그냥 성성한 것도 아니어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은하수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라느라 늘 한 몸 같이 살았던 그 은하수들… 내 영혼에 함께했던 그때의 신령감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몇십 년만인가?

고도가 더 높아지자 숲까지 하얗게 변해갔다. 나뭇가지들이 그러고 있었다. 동행이 눈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얼음꽃이리라 싶었다. 정취가 특별했다. 수백리에 가장 높은 산의 정상 부위, 첫새벽의 맑은 달빛, 그것에 비친 눈, 그리고 얼음꽃….

그래서 그랬을 것이었다. 팔공산 절경을 꼽는 어떤 경우에도 눈 풍경이 빠지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었다. 첩첩 산줄기 공산이 천 길인데 / 하늘 가득 쌓인 눈이 이슬까지 맑게 하네 / 신령이 무심찮음 이로써 알겠으니 / 매년 정월 원삼일에 풍년을 여는구나(公山千丈倚峻層 / 積雪漫空沆瀣澄 / 知有神祠靈應在 / 年年三白瑞豊登). 사가 서거정은 '대구 10경'의 하나로 '公嶺積雪'(팔공산 능선에 쌓인 눈)을 들었다.

'팔공산 십경' 중에도 공산성 야월(夜月)과 비로봉(주봉) 설화(雪花, 눈꽃)가 들어 있다. '팔공산 팔경' 역시 적석성(積石城, 공산성) 밝은 달, 백리령(百里嶺, 팔공산 긴 능선)에 쌓인 눈을 꼽았다. 이들을 한꺼번에, 그것도 원단에 만났으니 기자도 운 좋은 축에 끼일 터였다.

하지만 얼음꽃은 나무에만 핀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기자의 아래 위 눈썹이 함께 붙어 얼려 했다. 덮어쓴 복면 때문에 위로 몰려간 입김이 사단이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코-입 부분의 복면 자체가 얼어 뻣뻣해졌다. 방한 장갑도, 좋은 등산화도 맥 못 췄다. 손가락 발가락이 얼어 빠지는 듯했다. 셔터가 얼어붙어 카메라가 작동을 멈춰 버렸다. 바람이 너무 거세 몸이 얼음 위를 걷는 듯 휘청거렸다. 꼭대기 사람들은 영하 25℃쯤 될 것이라고 말해 줬다.

취재팀의 정 위원은 "히말라야보다 더 춥다"고 했다. 거기는 고산이어도 햇살만 비치면 오히려 더울 정도라 했다. 두 차례나 그곳 등반 취재를 다녀 온 경험에서 나온 비교였다. 드디어 도달한 정상. 대구의 야경이 참으로 따스해 보였다. 대도시를 그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가로등들일 터. 게다가 이 혹한이 저 먼 불빛을 더 따스히 느끼게 할 터였다. 혼자 비행기를 몰던 생텍쥐페리가 도시의 불빛을 그리워했던 외로움을 짐작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먼 산줄기들이 점차 거무스레한 등성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루엣이었다. 산이 깨어나고 있어요…. 성장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중의 한 구절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아침 7시30분쯤, 그 실루엣 능선에 붉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침반을 보니 정북에서 120도쯤 되는 방향. 운주산서 단석산으로 흐르는 낙동정맥인가 싶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주봉 정상부의 좁은 제천단으로 몰렸다.

그런데, 아! 저게 무슨 일인가! 어느 사이 붉은 용암 같은 것이 능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자꾸 번져 수백 리쯤 흘러가는 듯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팔공을 휘감았다. 깊은 밤이었으면 그건 틀림없는 큰 산불의 모습이었다. 화산 폭발 장면을 전하던 TV 화면이 연상됐다. 장관이었다.

휴대전화기가 7시37분을 표시할 즈음, 결국 해가 산등성이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어떤 이가 "정말 보기 드물게 깨끗한 일출"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팔공산 꼭대기에서만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사람. 백두산에 가더라도 천지 모습을 제대로 볼 운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과 크게 다르잖게 들렸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후배가 새해 인사 올립니다"… 전화도 왔다. "괜찮나? 안 춥나?" 살면서 만난 '우리 형님'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자의 안부를 확인해야 안심하는 분이다. 이번 팔공산 취재를 지원하기 위해서도 백방으로 뛰어줬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했었다. 시선이 안을 향해 돌아선다 싶더니, 순간 한기조차 아득해졌다. 정이 메마르고 세월에 무심한 기자이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이 순간만은 정말 새해 아침이었다.

'달얼모' 사람들이 제천단 아래 제법 넓게 닦여진 곳에 모여들었다. 제수가 준비되고 차일이 차려졌다. 제상의 제일 앞자리는 역시 돼지머리 차지. 이정웅 회장이 초헌을 한 뒤 제문을 읽어 올렸다. "성스런 자리 중악(中岳)의 제왕봉(帝王峰)에 소찬을 준비해 올리오니, 미물까지도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이 땅에 평화와 번영이 넘치는 한 해가 되도록, 팔공 산신이시여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뒤이어 연이어 여러 사람이 바닥에 너부죽이 엎드렸다.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들이 몸에서 몸으로 느껴져 나갔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취재팀을 불러댔다. 이 시리즈가 사고 없고 성과 있게 잘 진행되도록 절을 올리라고 했다. 2배 하면 되는 줄 알았으나 산신에게는 4배라 했다.

음복은 동화사 상가지구 산중식당으로 옮겨 아침 겸 점심 겸해 이뤄졌다. 모임의 회원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향토사가, 조경학자, 공무원, 언어학자, 시민운동가, 오랜 팔공산 등산인…. 이 고장 출신이어서 팔공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공원관리소장도 보였다. 즉석 토론회가 벌어졌다. 팔공산 봉우리-재 이름 바로 잡기도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모두 올 한 해 힘을 합치기로 했다.



험준한 공산이 우뚝이 솟아서 /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 할꼬 /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 /. 동화사 상가지구 중심 거리의 복판에 서 있는 한 돌에 새겨진 글. 매월당 김시습의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시라고 했다.

그 마음을 짐작할 듯했다. 팔공산을 공부하던 초기, 뜻만 바빴지 산이 언제 윤곽을 드러내 줄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산줄기 파악이었다. 갈 길 먼 사람의 속이 탔다. 먼저 3천배 하고 오라 했다던 어떤 큰스님 얘기가 떠오를 정도였다. 좋은 안내서를 제때 만날 인연은 없는 모양이라고 체념했다.

불가피했다. 첫걸음부터 혼자 힘으로 걸어 보기로 했다.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어느 후배 기자가 건네 주며 "꼭 읽어라"고 으름장 섞어 권했던 책이 생각났다. '태백산맥은 없다'. 처음엔 제목에 놀랐고, 다음엔 그 신선함에 취했으며, 드디어는 필자의 유려한 이야기 풀어내기에 탄복했던 책이었다.

책은 먼저 산 읽는 방법부터 가르치고 있었다. '산맥'으로 읽지 말고 '산경'(山經, 산줄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산맥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질 구조, 산경은 땅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산줄기라고 했다. 산줄기 흐름을 족보로 파악한 것이 '산경표'(山經表)라는 저술이고,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산경도라고도 했다.

하지만 '태백산맥'은 우리의 팔공산에 대해서는 끝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떨궈 놓은 것이라고는 '산경표' 영인본과 '남한의 산줄기'라는 지도 한 장뿐. 거기에 나타난 팔공산 관련 정보는 희미하고도 소략했다. 실체는 네 발로 네가 찾아보라는 뜻일까.

그래도 이들 자료는 방황하던 기자에게 실낱같은 등댓불이 됐다. 그 가녀린 빛을 놓쳐버릴까 노심초사하며 드디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지도 가게에 달려가 여러 종류의 지도를 한 아름 샀다. 산경표, 산경도, 그리고 대동여지도로 짐작해 가며 산줄기를 그려 갔다. 하지만 도움될다 싶은 지표는 화산(華山)밖에 없었다. 군위 인각사 부근. 차로 달려가 물었다.

"바로 저것이요, 저게 화산이요. 저기를 거친 산줄기가 갑령재를 타고 팔공산으로 가는 것이지요". 운좋게도 그들은 줄기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이 확 트였다.

이러구러 감을 익혀가고 있을 때 '신산경표'라는 책이 나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곧바로 서점으로 쫓아 가 펼쳐 든 책, 그제사 궁금증이 풀렸다. 2만5천 지도에 나타나는 산이라는 산은 거의 다 넣어 새로 산줄기 족보와 산경도를 만들었다니, 팔공산의 줄기도 이제 훤하게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다음 할 일은 그걸 들고 현장을 다니며 실제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팔공산은 어떻게 태어나 어디로 이어져 가는 산이란 말인가?

산을 산맥으로서가 아니라 산경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산줄기에는 대간, 정맥, 기맥(岐脈) 등의 등급이 있다. 가장 중요한 맥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따라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오는 백두대간이다. 대간은 태백 즈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반도의 복부로 들어 가 버린다. 대신 동해를 따라 계속 달릴 줄기를 하나 남겨 두니, 그것이 낙동정맥이다.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을 지나 신불산 천성산 금정산에 이른다.

팔공산으로 오는 줄기는 이 낙동정맥의 가지줄기 중 하나이다. 포항 죽장면의 '가사봉'(744m)에서 정맥을 빠져 나와 달의령-꼭두방재 맥으로 그 고을을 가로지른다. 베틀봉(934m)-면봉산(1120.6m)을 거치며 죽장의 북부-서부 경계선을 이루고 보현산(1124m)에 도달한다. 팔공산에서 바라 봐 정북(正北) 기준 60도 방향에 허리 부분을 구불구불한 도로 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 면봉산, 그 바로 앞의 것이 보현산이라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영천 화북면의 북서쪽 경계선을 만들며 갈재-방각산-노귀재를 거쳐 석심산(750m, 군위 고로면)에 이른다. 수기령-방가산(755m)을 지나 화산(824m)으로 오면서 영천과 군위를 경계짓는다. 갑령재를 거치며 물길을 신령천과 위천으로 나눠 붙인다. 그리고는 드디어 신녕∼부계 사이 도로의 두 고을 경계점에 있는 재(일명 자주고개)를 통해 본격적으로 팔공산 덩어리로 들어선다.

팔공산에서는 그 맥을 받는 배꼽 격인 시루봉(726m)에서 급하게 치솟아 정상에 도달한다. 비로봉, 제왕봉, 혹은 중봉이라 불리는 그것이 주봉이다. 높이 약 1193m, 낙동정맥에서 빠져 나온 이 가지줄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이것이 팔공산의 태생적인 족보이다.

못난 후손이 이제사 이러고 있긴 하지만, 옛 어른들은 진작부터 이 흐름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전문 지리서가 아닌데도 영천읍지는 팔공산을 "신녕 화산에서 온다"(來 自新寧花山)고 했고, 의흥읍지는 "화산에서 와 칠곡 가산의 주맥이 된다"(自華山 來 爲 漆谷架山 主脈)고 기록했다.

낙동정맥에서부터 팔공산을 거쳐 계속 흐르는 줄기를 하나로 보고 싶어졌다. 그걸 포괄하는 이름은 없을까? 주요 저술들에는 특별히 붙여 놓은 명칭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 산흐름을 두루 상대적으로 평가하느라 그럴 터. 하지만 팔공산을 중앙에 놓고 절대평가 해야 하는 우리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전문서적에는 없는 개념이지만, 여기서만이라도 '팔공기맥'(八公基脈)'이라 불러 둬 보자. 이 줄기를 기본 삼고 나머지는 곁가지로 보겠다는 뜻에서 쓰는 이름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 팔공기맥을 걷는 사람들 ---

이번 겨울 들어 첫 강추위가 닥쳤다던 지난달 28일 아침 7시15분쯤 대구 명덕네거리 어귀. 한 시간을 떨고 난 뒤에야 25인승 버스가 왔다. 취재팀이 탔을 때는 이미 10여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시 이곳저곳에서 멈추더니 승객은 합계 17명. 지난 여름부터 팔공기맥을 여러 구간으로 나눠 종주하고 있는 '산이 좋아'란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버스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와 추위에 떠느라 모두들 화 난 줄 알았다. 그러나 불평은 잠깐, 차 안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소풍 가는 아이들 마냥 들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영천 화산면 당지리 섭제골. 그 위 786m 봉우리, 방가산과 갑령재의 중간쯤이 이날 팔공기맥 걷기의 시발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 내리막을 거치고 화산(華山) 일대 광활한 고원의 억새밭과 고랭지 밭을 지났다. 목표점인 자주고개에 도달한 때는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하던 즈음.

모임 회원들은 리더인 허현(61)씨를 '대장'이라 불렀다. 존경심이 배여 있었다. 그는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20여 년 간 전국 600여 명산을 돌았으며 팔공산에는 500번쯤 올랐다고 했다. 지금도 흩트리지 않는 원칙이 격일 등산.

"팔공기맥은 본래부터 선명하지요. 다만 길이 시원찮을 뿐입니다. 여러 번 다니면서 나무를 치고 리본을 달아 놔 이제는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허 대장은 이 줄기가 매우 길고, 그 중에서는 팔공산이 가장 높은 산임을 강조했다.



'태백산맥은 없다'는 산과 물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철리(哲理)를 하나 내걸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되씹을수록 신통했다. 둘이 아닌 하나이나 섞일 수는 없다는 말. "남과 조화는 하되 혼동하지는 않는(和而不同)" 것이 군자라 했던 공자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 옛 조사 말씀이 연상됐다. 그 말의 배면은 더 신묘해 보였다. 물이 시작되는 곳이 산 끝나는 곳이노라, 산은 물을 나누는 물가름이 되고(山自分水嶺), 물은 산을 구획 짓는 산가름이 되노라….

그렇다면 물은 산줄기 흐름만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산의 외연도 규정해 줄 터. 어디서 어디까지가 팔공산인가를 공부하는 데 이만한 가르침이 없어 보였다.

북쪽으론 위천지맥, 외연은 위천

팔공산 외연에서 가장 명확한 물줄기는 뭐니뭐니 해도 남쪽의 금호강이다. 자잘한 물도 넘을 수 없는 것이 산이라는데 이 큰 물이야 말해 뭣하리. 얼른 살펴봐도 산의 남쪽 사면 물은 전부 금호강으로 흘러든다. 그렇다면 북쪽을 둘러싸고 팔공산 덩어리를 구분지어 주는 물길은 무엇일까.

단번에 눈에 띄는 것이 위천(渭川)이다. 군위군 고로면 화산(華山)에서 발원해 북서 방향으로 113.5km나 흐르다 상주 중동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일대에서 가장 큰 하천. 금호강의 길이 116km와 거의 맞먹는 규모. 그 위에 걸쳐진 의성 단밀의 한 다리에는 길이가 360m나 된다고 적혀 있었다. 짐작해 만든 산줄기 물줄기 지도를 들고 현장과 맞춰 보겠노라고 위천 줄기를 따라 다녔더니 하루 운행 거리가 300km나 됐을 정도였다.

이런 위천이 있게 하는 것이 내를 따라 낙동강의 합류점까지 함께 달리는 산줄기이다. 위천의 둑 역할을 겸하는 것. 이 지맥은 가산산성의 끝부분, 가산 바위를 지난 지점에서 출발한다. 응봉산(336m) 적라산(352m) 청화산(701m)을 거쳐 만경산(499m)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높지 않지만 끈질기게 달리며 시군을 구획 짓고 읍면을 나누는 막중한 일을 한다. 그 결과 줄기의 북에는 효령면, 군위읍, 소보면(군위군), 구천면, 단밀면(의성군), 남에는 가산면(칠곡군) 장천면, 산동면, 해평면, 도개면(구미시)이 분포한다. 여기서는 일단 팔공기맥의 '위천지맥'이라 불러 놔 보자.

서쪽 외연은 팔거천-소야재-한천

북으로 달리는 위천지맥을 낳는 즈음에서 팔공기맥은 또하나의 지맥을 서쪽으로 내보낸다. 다부동 앞 5호선 국도에서 동남쪽으로 우뚝한 오계산(466m)을 거쳐, 흔히 다부고개라 불리는 소야재(所也峙)를 건넌 뒤 황학산(761m)으로 연결돼 나가는 줄기. 그래서 붙여 봐도 좋을 듯한 이름은 '황학지맥'이다.

황학지맥은 황학산을 거친 뒤 여러 갈래로 나뉜다. 건령산(522m) 명봉산(402m) 말산(165m)으로 연결되는 맥, 유학산(793m) 천생산(407m)으로 가는 줄기 등등. 줄곧 서쪽으로 달리다가 낙동강변 작오산(303m)에서 생을 마치는 가장 극적인 줄기도 있다. 어쨌건 소야재를 넘어 서쪽으로 간 황학지맥도 낙동강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일. 그렇다면 팔공산권의 서쪽으로도 낙동강이라는 요지부동의 큰 경계선이 스스로 분명한 셈이다.

하지만 팔공산권의 서쪽 경계를 놓고는 산흐름이 소야재를 건너기 전에 시비가 생겨 버린다. 이 재를 기점 삼아 남북으로 깊은 골이 나타나는 탓. 남쪽인 대구 방향으로는 팔거천이 흐르고, 북쪽 군위 부계 방향으로는 한천(漢川)이 발원한다. 팔거천은 처음엔 금암천으로 생겨나 대구 칠곡을 거쳐 금호강에 이르며 점차 굵어지는 물줄기이다. 반면 한천은 북쪽으로 22km나 흘러가며 구미 장천, 구미 4공단(산동면)을 거쳐 산호대교 남편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옛날에는 다르게 불렸는지, 대동여지도가 장천(丈川)이라 표기한 것이 이 물줄기 같아 보인다.

이들 물줄기는 길고 그 계곡은 넓다. 때문에 이를 경계로 팔공산 본체와 황학지맥 덩어리를 나누어 판단할 수도 있을 터. 팔공산의 범위를 좁게 잡는다면 이 지점 산가름을 서쪽 경계로 삼아도 좋을 듯 보인다.

동쪽으론 신녕지맥 뻗어 신녕천 낳아

이제 그어야 하는 선은 팔공산의 동쪽 외연. 여기서는 신녕천을 경계선으로 꼽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신녕천은 팔공산 북사면(北斜面)의 치산계곡에서 발원한 뒤 화산 남사면 물까지 받아 영천 시가지 지점의 금호강에 이르면서 27.5km의 팔공산 외연을 형성한다.

산과 물은 둘이 아니라 했듯이, 이 신녕천의 내벽 역할을 하는 산줄기도 물론 팔공산에서 출발해 함께 달린다. 주능선이 동쪽으로 달리다 도마재(신녕재) 갓 지난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불룩하게 흐르도록 내보낸 곁줄기가 그것. 봉화산(164m) 대왕산(186m) 삼모산(277m)으로 이어지다 유봉산(243m)에서 끝난다. 나지막한 줄기이고 초입에 코끼리바위라는 절경이 있다. 팔공기맥의 '신녕지맥'으로 이름 붙여 봐 나쁠 것 없으리라.

이렇게 서쪽의 팔거천-소야재-한천, 북서쪽의 위천, 동쪽의 신녕천, 남쪽의 금호강을 외연으로 잡고 전문가에 의뢰해 잰 팔공산 권역의 면적은 555㎢(1억6천700여만 평)였다. 이쯤 하면 팔공산권의 외곽 산줄기는 거의 살핀 듯하다.

팔공 정상을 앞산으로 한 백학 마을

그러나 잠깐. 까딱하면 잊고 지나치기 쉬운 특이한 줄기도 하나 있으니, 챙겨 두자. 낙동정맥에서 온 주맥이 시루봉을 지나 정상을 향해 치솟는 것과 동시에 북서쪽으로 거꾸로 떨어뜨려 놓은 가지 줄기가 그것이다. 그 역방향성이 사람의 주목을 취약하게 만들 터.

이 줄기는 원줄기와의 사이에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라는 골짜기 마을을 하나 낳아 둔 뒤 거꾸로 달린다. 주된 역할은 남천과 위천을 구분 짓는 일. 따라서 '남천지맥'이라 불러두는 것이 기억하기 좋을 것이다. 삭골재를 지나고 군위의 우보-효령을 경계지으며 400여m 높이로 이어가다 매봉산(488.7m)으로 맺힘으로써 주행을 마친다. 이 줄기가 끝난 뒤에야 남천과 위천이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백학리, 그 중 특히 소상 마을에서는 팔공산 주봉 부분이 거의 집 앞마당 같이 느껴진다. 거기서 시루봉은 얌전한 색시마냥 다소곳하다. 더욱이 이 백학리 즈음은 분수령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는 곳. 좁은 지구인데도 산줄기로 갈려 한 물줄기는 동(신녕천)으로, 한 물줄기는 북(위천)으로, 다른 한 물줄기는 서(남천)로 흩어져 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 발맞춰 동네도 완전히 갈려, 동쪽은 영천 신녕, 중간은 군위 산성, 서쪽은 칠곡군 부계로 달라진다.

중요한 봉우리와 재들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취재팀은 팔공산 속 마을들의 어른들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그리고 성과도 있었다. 재와 골짜기들의 전래 명칭이 거의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어르신들도 봉우리 이름에 대해서는 자신 없어 했다. 돌아오는 답의 대부분은 "모르겠다"는 쪽이었다.

골과 재의 이름은 아는데 봉우리 이름은 왜 모를까? 노인들과의 토론 결과 내려진 판단은 이랬다. "나무를 하거나 풀을 베거나 나물을 뜯던 옛날 산 생활의 무대는 골이었다, 그래서 골과 그걸 넘어 다니던 재 이름은 지어졌지만 봉우리는 관심 밖이었다".

한 소설가 지망생은 1970년대에도 이미 팔공산 봉우리들의 이름 찾기가 불가능하더라고 전했다. 이 산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현지 답사는 물론 서울의 주요 도서관을 뒤지기까지 했다는 신녕 출신 이장희(60)씨의 증언. 1천200매 분량의 소설을 쓰긴 했으나 끝내 봉우리 이름은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더라고 했다.

그래도 어디 묻혔을지 모르는 전래의 이름을 발굴해 내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터. 독자들의 참여가 절실한 부분이다. 다만, 갈 길 바쁜 이 시리즈는 불가피하게 이름 없는 봉우리들에 임시 명칭들이라도 지어 붙여 가며 산줄기를 설명해 나가야 할 판이다.


미타봉 밑 낙타봉에서 1월26일 바라 본 팔공산 설경.
염불암이 고즈넉하고 그 위로 염불봉과 주능선이 눈에 덮여 펼쳐져 있다.


흔히 말하는 팔공산의 주능선은 가산(901m)에서부터 주봉(1193m)을 거쳐 관봉(852m)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 시리즈 제작에 지도 부문을 맡아 동참 중인 임용호씨가 길이를 도상 측정한 결과는 약 20km였다. 도면상 주능선을 따라가되 오르막 내리막을 고려해 계산한 것. 평면 측정 거리는 18.7km라 했다. 걷기 편한 대로 이리저리 굽어 다니는 등산로상 거리와도 차가 있다.

이 주능선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16개의 중요한 산줄기들을 내려보낸다. 동서남북 방향에 각 4개씩. 그 줄기들 사이에 같은 숫자의 큰 골짜기가 형성돼 마을들이 자리 잡는다.

서쪽부터 보자면, 주능선은 그 끝 가산에서 3개의 줄기를 낸다. 한 줄기는 더 서쪽으로 달려 또 하나의 크다란 산군(山群)을 형성한다고 소개했던 황학지맥. 두 번째는 북쪽으로 달려 의성 단밀까지 내리 뻗는다 했던 위천지맥이다. 그 서편 기슭에 5호선 국도와 금화리, 천평리(가산면) 계곡들을 분포시킨다. 동편 기슭에는 사창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산면의 마을들이 있고, 그 하류에는 군위 효령면의 고곡리가 넓은 들에 퍼져 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줄기는 남서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조그만 두무실골(동명 학명리)을 형성한 뒤 팔거천을 따라 남하하면서 5호선 국도의 동편 등성이를 이룬다. 이 줄기는 양지마을 뒷산까지 이어진다. 남원천을 사이에 두고 송림사를 바라다보는 곳.

이렇게 세 개의 줄기를 떨어뜨려 둔 뒤 주능선은 가산을 출발해 한티재로 향한다. 5km조금 넘을 이 구간은, 과장해 말해 사람 비킬 공간이 없고 빗방울조차 머물 수 없는 칼날 능선. 빗방울은 떨어지는 즉시 북쪽이나 남쪽 계곡으로 굴러야 할 판이다.

하지만 주능선은 출발한 지 2km도 못달려서 20km 전구간 중 고도가 가장 낮은 부분을 선보인다. 높이 700m 이하. 그 목을 통해 남북사면을 이어주는 길이 났으니, 재가 된 목의 이름은 '선돌재'이다. 선돌(立石)이 있는 재라는 뜻. 그 선돌은 형상 따라 '할배할매바위'로 불린다. 북사면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선돌재를 넘어 동명 장을 봐 왔다고 했다. 돈 될 것이라고는 땔감밖에 없던 시절, 그 나뭇짐을 짊어지고 일대 생활권의 중심이던 동명을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멀잖아 치키바위(756m)로 올라서는 주능선은 거기서 제법 긴 줄기 하나를 남쪽으로 내려보낸다. 마지막 닿은 곳은 송림사 뒷산. 이 줄기의 서편이 남원리골이고 그 골을 흐르는 물길은 남원천이다. 일단 송림사 앞 동명저수지로 흘러 들었다가 팔거천에 합류한다.

그런 다음 주능선은 가산∼한티재 구간 중 가장 높은 808m 봉우리를 거친 이후 786m 봉우리를 만난다. 이 봉우리로부터는 칠곡 가산면(사창천골)과 군위 부계면을 가르는 중요한 산줄기가 북쪽으로 흘러내린다. 줄기의 동쪽에 있는 남산리.동산리.대율리 등은 남천을 중심천으로, 팔공산의 중요한 주능선 대부분을 동네 앞 스카이라인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786m 봉우리는 팔공산 동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셈. 이 비중 높은 봉우리에 이름 없음이 한스럽다. 사창천골의 음지가라골 어른들은 '큰골 말랭이'라 부른다고 했다. '큰골'의 위에 있는 봉우리라는 뜻. 하지만 여기선 일단 '부계봉'이라는 임시 이름을 하나 부여해 줘 보자. 부계는 팔공산 북사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을이면서도 주능선 봉우리에 제 이름 하나 붙여 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부계봉에서 다시 걸음을 뗀 주능선은 한티재(약 700m)로 한참 내려선다. 그리고는 834m 봉우리로 몸을 높이면서 그 남쪽으로 줄기를 하나 떨군다. 파계사 성전암 뒤가 그 출발점. 이 줄기는 870m 이상의 높이로 시작해 한참 동안 높게 이어져 가며 대구와 경북의 서쪽 경계선을 이루고, 한티골을 품어 안기도 한다. 그러다가 급격히 낮아져 소멸하는가 싶게 하다가는 되살아나 도덕산군(山群)이라는 중요한 권역을 일궈 낸다. '대왕재'라는 비장의 맥을 타고 물길의 위협을 돌파한 뒤 그 남쪽으로 큰 산 덩어리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 있는 산줄기의 시발점인 870m대 봉우리군의 이름도 불명확하다. 3개로 구성된 그 봉우리군 이름을 제대로 파악할 자료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 밑 송정마을 노인들은 '도객이'라고 불러 왔으나 유래는 모르겠다고 했다. 자세한 지명 조사가 필요할 터. 봉우리가 셋인 점에 주목해 여기서는 우선 '삼봉'이라 이름 붙여 놔 보자.

이 부분을 지난 주능선은 높이 800m 정도로 잠시 몸을 낮춰 사람들에게 파계재라는 길을 열어 준다. 이쯤 오면 주능선도 거의 40%를 주행한 셈. 여기까지의 주능선 높이는 대체로 700m 이상이지만 850m를 넘지도 않는다. 다른 구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얌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팔공산 산경도 : 팔공산의 중요한 산줄기들을 거의 다 그렸다. 빨갛게 표시한 것은 주요 능선이고, 가산에서 관봉에 이르는 주능선에서 뻗어 나온 빨간 줄기들이 지역과 계곡을 가르는 주요 능선들이다. 주요 봉우리 및 재들이 표시됐고, 물줄기는 푸른 선으로 나타냈다.
(※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지막하던 주능선의 기세는 파계재를 지난 뒤 달라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표고 900m 이상의 능선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994m 높이의 '장꼬방봉'으로 급등하는 것이다. 흔히 '파계봉'이라 불리지만, 그 이름은 잘못된 듯하다.

이 봉우리는 이름으로만 봐서는 파계사 뒷능선 쯤에 있는 것으로 들릴 수 있을 터. 또 그런 연관성이 없고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계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다. 파계사 뒷산이 아니라 더 동쪽에 있는 신무동 뒷산인 것이다. 조금만 주의 깊은 등산객이라면 틀림없이 의아해 했을 일. 차라리 '신무봉'이라 했더라면 믿고 넘어갈 수도 있었으리라.

현지의 의견을 모아 봐도 그 명칭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됐다. 그 남쪽 바로 밑 동네 무산 마을에서는 파계봉이라는 말에 실소를 어쩌지 못했다. 들어 본 적도 없는 이야기라고. 그러면서 이름을 아무리 마구 지어 붙인다 한들, 파계사 있는 데가 어디라고 그 멀리서 이름을 끌어다 쓰느냐고 했다. 파계사는 신룡동, 994m 봉우리는 신무동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다.

'파계봉'이 아니라면, 혹시 '물불산'이 옳은 이름인가 싶어 확인하러 다녔다. 물불산이란 이름은 문보근이란 분이 쓴 소책자에 나오는 것. 옛 공산국민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6.25 나기 직전이던 1950년 1월에 출간한 대구 공산지역 개괄서여서 신빙성도 높아 보였다. 이 소책자를 우연히 얻어 귀하게 챙기고 있던 중, 현지에서도 '물불이'라는 명칭이 들렸다. 중대동-송정동 등 주능선 남쪽 마을 노인들은 "신무동 뒤에 물불이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나무하러 많이 다니던 곳이어서 모두들 훤하다는 것. 그렇다면 파계봉이라 잘못 불리는 봉우리가 물불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현지 증언과 대조해 본 결과 994m 봉우리는 물불산도 아니었다. 무산 마을 어른들은 '물불이'가 봉우리 아닌 계곡의 이름일 뿐이라고 했다. 신무동 지역 내 계곡은 서쪽부터 크게 물불골, 정가골(교원연수원 뒤), 환산골, 성지골(부인사 뒤)로 나뉘고 물불골과 정가골 능선의 중간에 994m 봉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소책자의 저자는 물불산의 위치로 파계사 뒷산을 지목했다. "팔공산이 서쪽으로 뻗은 곳에 물불산(勿佛山)이 있어 서촌 분지의 뒷담을 이루고 그 밑에 파계사가 있다"고 기록한 것. 조선조 이래로 공산지역을 서촌면과 북촌면 두 개로 나눌 때 생긴 구분 중 하나가 서촌이다. 이렇게 보면 문 교장의 설명에 맞는 봉우리는 파계사의 정북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보다 더 동쪽에 있어서는 서촌이 아니라 북촌의 뒷담에 해당되기 때문. 994m 봉우리가 바로 북촌에 속하는 예이다.

994m 봉우리의 이름을 주민들은 '파계봉' '물불산'이 아니라 '장꼬방 말랭이'라 했다.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이다. 그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비유일 터. 그래서 지금 말로 풀면 '장꼬방봉'인 셈이다.

정밀한 조사가 이뤄지기 전이긴 하지만, 일단 '파계봉'이라는 이름은 파기하고 시작해야 할 듯하다. 이치에 맞지 않고 현지 사람 누구도 쓰지 않았던 출처 불명의 이름을 자꾸 되뇌어서야 될 일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주능선은 '장꼬방봉'에서 매우 길고 우뚝한 줄기를 하나 내보내 남사면을 확연히 구분 짓는다. 파계사 동편 스님들의 다비식이 많이 열리던 중산골 꼭대기 750m 봉우리를 거쳐 거저산(491m)으로 흘러내리는 이 줄기는 그 서편의 지묘천골(신룡동)과 동편의 용수천골(신무동)을 갈라놓는 갈림이다. 이 줄기를 경계선으로 해서 서편은 서촌면, 동편은 북촌면으로 행정구역이 달랐던 때도 있었다.

'장꼬방봉' 부근에서 그렇게 씩씩해지긴 했으나, 주능선이 해발 1천m를 돌파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표고는 한참 동안 960∼970m대를 오르내리다 '마당재'에 이르러서는 950m 이하로 다시 주저앉기까지 하는 것이다.

마당재는 남사면의 부인사 일대와 북사면의 부계 남산리를 연결한다. 파계재에 이은 또 하나의 중요한 통로. 가산서 온 주능선이 이 마당재에 도착하기 직전 헬기장 터를 하나 마련해 주니, 그 인접 봉우리 팻말에다 어떤 사람들이 '마당재'라 적어 놨다. 혼란을 부를 위험성이 다분했다.

이 마당재의 연결 통로는 좀 특이하다. 북사면에선 도리미양지골로 내려서지만, 남사면을 내려가는 통로는 계곡 아닌 능선인 것이다. 주능선이 헬기장에 도달하기 직전에 있는 980m 정도 높이의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그것. 이 줄기는 동쪽으로 휙 감아 내리면서 용수천골의 상층부를 거의 반분해 놓은 뒤 수태못 서쪽 능선 역할까지 해 준다. 그 서편이 신무동, 동편이 용수동이고 부인사는 서편에 있다.

반면 마당재를 지난 뒤 주능선은 북쪽으로도 작잖은 줄기 하나를 내려보낸다. 그 줄기가 부계골의 남산리와 동산리를 구분시킨다.

여러모로 중요한 그 마당재를 지나자 말자 우뚝 솟은 벼랑바위 능선이 장관을 드러낸다. 당장 1천18m로 치솟더니 1천54m로 더 높아져, 드디어 1천m를 뛰어 넘은 능선을 이어가는 것이다.

어떤 등산지도는 주봉 서쪽의 이 벼랑바위 능선을 '칼날능선'이라 표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톱날바위'라 불렀다. 하나 이가 어긋난 모양새로 봐서는 '톱날능선'이란 이름이 어울릴 성싶다.

그러나 벼랑바위 능선을 살피기 이전에 먼저 정상부를 주목해 둬야 할 듯 하다. 벼랑바위 능선을 팔공산의 백미라 할 때, 그 중심에 정상부가 있기 때문.

팔공산의 정상부는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동서로 뻗는 주능선과 북으로 뻗는 팔공기맥의 젖줄 능선에 걸쳐 ⊥ 형태의 큰 덩어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정상부는 우선 주능선상에 서봉-주봉-동봉의 삼봉(三峰)을 형성한다. 그 세 봉우리 사이에는 두 개의 재가 있다. 서봉과 주봉 사이에 있는 것은 '오도재'로 통하나, 주봉과 미타봉 사이에 있는 재의 이름은 좀 복잡하다. 북사면의 백학마을 사람들은 '생부처메기'라 불렀지만, 남사면 사람들은 '장군메기'라고 했다. 생부처메기는 그곳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석불상에 인연한 이름일 터. 장군메기라는 호칭에는 이곳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던 지역민들의 기억이 깔려 있는 듯 하다. 재 북쪽에는 '장군수'라는 샘도 있다고 했다.


미타봉(동봉) 정상 모습. 더 멀리로 보이는 것이 삼성봉(서봉)이고, 서쪽을 향해 달리는 주능선이 그 뒤로 펼쳐져 있다.

서봉-(오도재)-주봉-(장군메기)-동봉의 구성은 트라이앵글을 연상케 한다. 주봉이 좀 북쪽으로 물러앉았고 양 날개는 남쪽으로 나와 있어 더욱 그렇다. 주봉이 양쪽으로 부하들을 거느린 듯한 느낌.

서봉은 그 바로 밑에 있었다는 '삼성암'(三聖庵)이라는 절의 이름에서 따 '삼성봉'이라 부르는데 별 이의가 없는 듯 했다. 등산단체들은 새해가 되면 삼성암 터에서 시산제를 지낸다고 했다. 주능선 종주 때 등산인들이 자고 가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저녁엔 낙조가 좋고, 밤엔 대구 야경이 절경이라 했다.

삼성암 절 자리는 100여평 면적으로 잘 닦여져 있었다. 좌향은 정 서남향. 우물도 있고, 기도 드리기 좋을 굴도 있었다. 모습 당당한 초석들이 여전히 제자리에 놓여 있고, 그 밑으로는 기와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뒤로 빙 둘러 천연의 기암 병풍이 벌려 섰고, 바로 앞으로 삼성봉의 아들이라 할만한 '성인봉'(903.5m)이 우뚝이 보였다.

'삼성암'은 거기서 부인사 쪽으로 한참 더 내려간 곳에도 하나 있었음이 확인돼 있으나, 그것은 三省庵으로 한자가 다른 것 같았다. 선돌에 새긴 불상을 모셨던 암자. 마애불상은 15도쯤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쭉한 바위에 새겨져 있고, 이를 유형문화재 21호로 지정한 대구시는 "신라형에서 고려형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연구할 자료"라고 적어뒀다. 그 아래 옛 절터에서는 한 보살이 30여년째 움막 절 지어 사는 중이라고 했다.

어느 삼성암의 이름을 따 삼성봉이라 하는지 궁금해 일대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모두가 두 말 없이 서봉 바로 밑의 三聖庵을 지목했다. 다만 이 암자가 있던 골을 "삼성"이라 불렀을 뿐 봉우리에까지 그 이름을 붙였었던지는 명확히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아마 ’삼성 말랭이’ 정도로 불렀을 터.

그런데도 지금은 서봉의 두 돌봉우리 중 남쪽 것에는 서봉, 북쪽 것에는 삼성봉이라는 팻말이 박혀 있다. 넌센스일 것이다. 큰 봉우리 이름도 애써 챙기지 않던 옛 어른들이,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돌봉우리들을 그렇게 세밀히 분간할 리 없었을 터. 임의로 표석을 세우는 일은 본의와 달리 오히려 혼란을 끼칠 수 있으리라 싶었다.

TV 송신탑들이 무성한 주봉 역시 팔공산 최고봉이면서도 아직 본래의 이름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비로봉' '제왕봉'에다 '장군봉'이란 기억까지 있는 모양. 의견이 있는 분들이 모두 나서 줘야 제 이름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 '팔공산하'가 그 의견 교환의 장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놨다. www.imaeil.com에 들어 서면 '팔공산을 천산으로'라는 창이 열려 있다.

주능선 상에는 이같이 동서로 펼쳐진 서봉-주봉-동봉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돼 있으나, 팔공산 정상부는 이 정도로는 완성되지 못한다. 그 트라이앵글의 정점(주봉)을 출발점으로 해서 북쪽으로도 2개의 봉우리를 더 연결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부는 삼중 구조라 해야 적절할 특이한 형태. 몇십m씩의 거리를 두고 남쪽과 중간과 북쪽에 각 한 개씩, 합해 세 개의 정상 봉우리가 있다고 해야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모습이다.

북으로는 긴 장대를 하나 걸쳐 이어가는 중에 중간은 작은 공에 의해, 끝은 큰 공에 의해 받쳐지는 양상이다. 더욱이 남북간의 이들 세 봉우리는 높이도 비슷해서, 첨단 측량 기술을 원용해야 제일 남쪽 것이 제일 높은 줄 판단할 수 있을 뿐. 그냥 나무하러 산에 다니던 시절에야 진짜 정상이 어느 것인지 구분조차 안됐을 터이다. 덩치로 본다면 오히려 맨 북쪽 것이 주봉으로 인식됐으리라 싶을 정도. 실제로도 골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제일 큰 것이 제일 높은 봉우리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남북으로 3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나가다 보니, 남쪽 주봉에 서면 팔공산의 남사면은 훤히 살펴지지만 북사면은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북쪽 정상에 서면 북사면은 확 트이지만 남쪽은 깜깜이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 본다면, 남사면에서는 남쪽 주봉만 보이고, 북사면에서는 북쪽 정상만 보인다. 그래서 남사면 사람들은 남쪽 주봉에 주로 관심을 쏟으나, 이 산을 앞마당 같이 다녔던 북사면 사람들의 기억에 그건 명확히 각인조차 되지 못하고 있었다.

남쪽 트라이앵글이 북쪽 큰 공으로 연결돼 나가는 맥은, 이미 살펴봤던 '팔공기맥'이 오는 길목이다. 첫 봉우리는 말할 것 없이 앞에서 살핀 팔공산의 주봉. 두 번째 봉우리는, 그 밑에 사는 부계 사람들이 '남포루'라 불러 왔다고 했다. ’남쪽에 있는 대포 요새’ 같이 생겼다는 뜻이라고.

그걸 거쳐 도달하는 세 번째이자 가장 큰 봉우리의 윗부분은 평탄해 넓은 평원 같다. 대구 쪽에서는 상상조차 안되지만, 북사면의 백학 마을에 가면 그 모습이 선명히 잡힌다. 그쪽 사람들 중 일부는 그 고원을 '말 궁둥이'라 비유했다. 듣다 보니 '누굴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봤던 살쪄 둥그래진 말의 궁둥이가 문득 떠올랐다.

이런 특이한 형상은 고원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끝남으로써 빚어질 터였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음으로써 그 궁둥이를 뚜렷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절벽의 남쪽 면은 '청운대'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절경. 그 절벽에 기대어 오도암이 깃들었다.

그 고산 평원에 '공산성'(公山城)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고산 평원 봉우리를 남사면 사람들은 ’구산성’, 북사면 사람들은 '성안'(城內) 혹은 '이성안'이라 불렀다. ’이성안’은 옛 성의 안이라는 뜻이라고 한밤마을 출신 홍상근 군위군의원이 전했다. 공산성은 팔공산권 최악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녔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미타봉 바로 밑의 삼성암 터. 평평한 100여평의 땅 뒤로 바위 병풍이 둘러 섰고, 우물과 기도하기 좋을 듯한 바위 굴을 갖췄다. 앞쪽으로는 성인봉이 우뚝하다. 종주 등반인들이 야영하는 자리이자, 대구 야경이 비할 데 없고 낙조가 뛰어난 곳이라고 했다.



주봉 서편으로 펼쳐진 톱날능선 모습. 수많은 선돌들이 모여 능선을 이뤘다.

팔공산 벼랑바위 능선의 핵심은 주봉 서편의 톱날능선, 정상부 트라이앵글, 주봉 동편의 바위병풍 등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간단히 말해 서쪽 톱날능선에서 동쪽 바위병풍까지. 길이로는 5km 정도이다. 유독 이 구간에서만은 높이도 줄곧 해발 1천m 이상을 유지한다. 1986년의 한 보고서는 그 높이에 해당하는 산 면적이 60여만 평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주봉 서편의 톱날능선에 맞먹을 동편 벼랑바위 능선의 상징으로는 '병풍바위'가 꼽힌다. 어떤 글은 그 높이가 80여m, 길이가 1km쯤 된다고 측정했다. 격을 맞추려 작정이라도 한 듯, 그 북사면에는 팔공산 최고의 절경지라는 치산계곡이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동화사골이 포진했다.

하나 '병풍바위'라는 이름에는 뭔가 부적절한 낌새가 있다. 수많은 바위들이 모여서 병풍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병풍 같이 생긴 바위가 겨우 하나 있는 듯 생각케 하는 것이다. '바위병풍'이라 부르는 것이 더 격에 맞아 보였다.

팔공산의 벼랑바위 주능선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준수한 바위들이 쭉 늘어서서 능선을 만들고 있는 거기엔 흙이 없다. 기암괴석들뿐. 서릿발 같고 칼날 같다. 속기나 잡티라곤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그곳은 신선의 땅.

그래서이겠지만 이 벼랑바위 능선은 사람이 타고 걷기 불가능하다. 무리하게 그걸 타려해서는 위험하다. 30여년 전엔 톱날능선에서 큰 사고가 난 적 있다고 했다. 그래서 등산로는 주로 그 능선의 북쪽 음지로 피해 간다. 능선을 걸어보지 못하는 마음엔 안타까움 뿐. 남쪽으로 펼쳐져 있을 확 트인 전망을 볼 수 없으니, 눈 묶고 걷듯 답답함이 가득하다.


팔공산이 얼마나 희고 밝은 산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명마산 가는 줄기. 화강암 관입으로 형성된 이 산의 특징이 선명히 드러난다.

벼랑바위 능선이 바위병풍에서 끝난다고 해서 절경의 바위들이 팔공산에 더 이상 없는 것도 아니다. 능선을 이루지는 못할지라도 온 산 곳곳에 바위들이 지천이다. 노적봉, 농바위, 방아덤 같은 것은 바위 자체로 돌 봉우리를 이뤘다. 어떤 구간에서는 바위만 밟고 다녀야 할 정도.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동봉 혹은 미타봉이다. 이 봉우리는 그 요체가 능선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바위 군을 아랫도리로 거느렸다.

어떤 산 예찬가는 나무가 좋고 물이 좋지만 역시 좋은 산의 핵심은 바위라 했다고 한다. 팔공산이 명산임도 바로 여기서 출발할 터. 게다가 팔공산의 바위는 예사 바위가 아니다. 독특하게 희고 밝다. 대구 앞산의 바위는 검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다. 그래서 기품 있고 신성스럽다.

이런 사실을 이론적으로 깨닫게 해 준 것은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가 쓴 '전영권의 대구 지리'라는 책이었다. 전 교수의 설명을 근간 삼고 주변 취재를 보태서, 팔공산이 어떻게 해서 이런 특징을 갖게 됐는지 살펴보자. 이야기는 옛날 옛적 팔공산이 생겨나기 이전 시기에서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1억년 전쯤 경상도는 거대한 호수였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돼 있는 땅이었고 그 사이에 '경상도 호수'가 있었다. 호수였다 보니 경상도의 기본 지질은 당연히 퇴적암이다.

그 호수 가에 공룡들이 살았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공룡 화석은 거의가 경상도 일대에서 발견된다. 그때는 지질시대 구분상 중생대 백악기. 한국에서 공룡 영화가 만들어졌더라면 '쥐라기 공원'이 아니라 '백악기 공원'이란 제목이 붙여졌을 것이라고 전 교수는 판단했다. 서양에서는 그에 앞선 쥐라기에 공룡들이 살았었던 모양이다.

화산 폭발로 산들의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뒤였다. 비슬산과 대구 앞산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앞산의 바위는 화산암이고, 그래서 검다. 화산 폭발 시기가 하도 오래 돼 흔적들이 많지 않으나, 그곳에서도 기둥 모양(柱狀)으로 갈라진(節理) 바위들은 발견된다. 마그마가 식을 때 생긴 것.

팔공산의 바탕이 형성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6, 7천만년 전. 다른 분야를 전공한 한 저명 학자가 어떤 책 서문에서 팔공산을 "수억년이 지난 산"이라고 쓴 것은 잘못된 셈이다.

팔공산은 생겨나는 방식에서도 비슬산이나 대구 앞산과는 전혀 달랐다. 화산이 분출한 것이 아니라, 화강암이 치솟아 올랐다. 화강암은 화산암과 달리 희다. 그래서 화강암 산은 밝고 기품 높다. 바로 여기서 팔공산의 특징이 생겨났다. 팔공산이 얼마나 밝은 산인지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관봉에서 와촌 명마산으로 가는 줄기가 그것. 특히 겨울철에 대구서 와촌으로 넘어가다 보면 차 안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화강암 분출로 암석 구성이 달라진 뒤 융기운동을 받아 산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본래의 호수 바닥이 치솟아 육지가 되고 산이 된 것이다. 4, 5천만년 전의 일이었다. 공중으로 솟아 오른 곳에서는 비바람에 돌과 흙이 깎여 나가는 침식현상이 시작됐다. 그 방식은 약한 돌이 더 빨리 깎여 없어지는 차별침식. 그 결과가 지금 같은 산과 계곡의 모습들이다.

팔공산에 특이한 형상의 바위덩어리들이 많은 것도 '화강암 관입'과 관련돼 있다. 화강암의 재질은 지층 밖으로 나올 때쯤 급격히 약화된다. 약해진 저항 압력 탓에 스스로가 부풀어지는 탓. 그 결과 암괴 사이에 쉽게 금이 가 갈라지면서 사람이 만들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형상들을 연출해 낸다. 팔공산 주능선의 벼랑바위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런 바위들은 선바위, 선돌, 탑바위 등으로 불린다. 그냥 그대로에 조각이 행해져 갓바위 불상이 되기도 하고 동봉 여래 입상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화강암은 쉽게 닳고 풍화돼 외모도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이런 선바위들이 주능선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팔공산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명마산 가는 줄기에도 그걸 대표할만한 바위가 있다. 능성동 마을 안으로 들어가 내릿골로 올라가면 만나지는 '장군바위'. 그 모양은 오히려 완벽하게 펜촉을 닮았다. 3단으로 된 기암, 일부러 만들려해도 이루기 쉽잖을 모습.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속인들은 상시 기도처로 삼는다고 했다. 경산시가 그 앞에다 세워 놓은 비석이 좀 위태로와 보였다. 거기 적힌 높이는 펜촉의 높이가 아니라 한참 떨어져 있는 명마산 것인 듯했다.

화강암이 닳아 가루 된 것이 마사(磨砂)이다. 땅을 파삭파삭하게 만들고, 빗물에 쉽게 쓸려 내려가서는 모래밭을 형성한다. 경산군 와촌면 박사천(博沙川)은 이 마사가 쓸려 내려 와 모래밭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것에 바탕해 모래땅을 좋아하는 사과나무가 일대에 널리 심겨졌다. 산의 살 자체가 마사로 돼 있는 경우도 적잖다. 치산계곡 공산폭포 가는 길은 마사 산을 뚫고 나 있다. 덤프트럭을 대 놓고 퍼 싣기만 하면 될 듯하다.


명마산 가는 줄기에 있는 장군바위.
펜촉을 닮은 이 천연 탑돌은 일부러 시도해도 빚기 쉽잖을 명작이다.

동화사골 상세 지형도

바위병풍을 마지막으로 해발 1천m의 벼랑바위 구간을 끝낸 주능선은 도마재(955m)로 잠시 몸을 낮췄다가 997m 봉우리로 올라서면서 동쪽으로 '신녕지맥'을 내려보낸다. 신녕과 청통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신녕천의 둑 역할을 겸하고, 한참 달린 후에는 그 남사면으로 '거조암'을 품어 안기도 하는 중요한 산줄기. 이런 줄기의 출발점이니 997m봉에는 '신녕봉'이라는 임시 이름표를 달아 줘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그런 뒤 주능선은 또 바른재(850m)로 낮아졌다가 다시 930m 봉우리로 솟아오르는 바, 동봉(미타봉)에서 여기까지 흐르는 이 구간은 부채꼴인 동화사골의 뒷담이기도 하다. 주능선은 930m봉에서 한 산줄기를 흘려 보내 부채꼴 호(弧)의 동쪽 빗변을 형성케 함으로써 뒷담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부채꼴의 서쪽 빗변은 말할 것 없이 동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가 맡는다. 이 줄기는 세칭 '낙타봉'(917m)를 거쳐 케이블카 종점 봉우리(810m)까지 직하한 뒤 동쪽으로 휘어 동화사 서문(금강문)을 지난다. 그리고는 학봉-모고진 등의 마을을 건너 백안동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용수천골의 일부인 수태골로부터 동화사골을 갈라놓는다.

취재팀을 인도해 이 줄기를 거슬러 오르던 '산이 좋아'의 허현(61)씨는 "요즘 팔공산 인기 등산로가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등산로도 세월 따라 많이 변한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등산로의 천이(遷移) 현상을 주도한 것은 남사면 시내버스 노선의 변화였다.

허씨의 말을 듣다가 문득 이곳에 동화사골의 중요한 지역사가 깃들어 있구나 싶어졌다. 이곳 저곳에 수소문했다. 동창골에서 자라 팔공산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찡해진다는 김팔갑(67)씨, 그의 동기생이자 문화계에서 오래 활동해 그쪽 눈이 넓은 송상무씨, 대구시청 대중교통과 등의 이야기와 현지 답사 결과를 근간으로 할 때, 동화사골의 구성과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볼 경우 동화사골은 우선 더 여러 골로 나뉜다. 기억의 용이성을 중시한다면 크게 세 덩어리로 분간해 두는 것이 좋을 듯. 동봉 쪽으로부터 차례대로 암자골, 수시골, 폭포골 등이 그것이다. 구분의 기준은 물 흐름이다.

'암자골'이라 모아 불러둬도 될 듯한 계곡은 비로암-부도암-내원암-양진암-염불암 등 다섯 암자가 모여 있는 그 골이다. 이 암자들 역시 더러 서로 다른 골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물은 결국 큰 절 서문 연못으로 모여든다. 암자골은 그 연못 동편을 타고 오르는 찻길이 난 산줄기, 통일대불 뒷산으로까지 내리 뻗는 그 산줄기에 의해 수시골로부터 구분된다. 그래서 암자골은 사실상 동화사 큰 절 밖의 공간이라고 판단해야 할 듯하다.

폭포골의 입구는 동화사 남문(일주문)에서 큰 절로 가다보면 금방 나타난다. 하지만 입구가 좁아 큰 골이 하나 별도로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일 정도. 구석진 공간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큰 절의 여러 전각과 요사가 있는 모든 공간은 수시골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동화사 자리가 곧 수시골이고, 일주문에서 올라가면서 만나는 모든 공간이 수시골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큰 절 뒤로 해서 주능선까지 펼쳐지는 골의 깊은 부분은 쉽게 볼 수 없다. 큰 절과 금당선원 사이로 나 있는 골 입구가 이들 시설에 의해 가려져 매우 좁아진데다, 그리로는 출입이 어렵도록 막아둔 탓이다.

골 이름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현지인들이 수시골이라 하는데도 지도들은 '수서골' '수숫골' 등으로 해석을 보태 표기하고 있다. 어원 연구가 필요할 터. 5천분의 1 지도가 표기한 '금당서원'이라는 이상한 이름 역시 시급한 수정 대상이다.

하지만, 동화사골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더 주의해 봐 둬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동창골'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그것.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던 골이다. 수시골과 폭포골을 구분 짓는 산줄기가 막바지에 두 갈래로 갈라져 그 사이로 이 골을 낳았다. 물이 폭포골로 합류하니, 그 가지 골짜기라 보는 것이 옳을 터. 그래서 큰 절에서 출발해 금당선원 뒤 산줄기를 넘어가면 먼저 동창골이 나오고, 거기서 나직한 산등성이를 하나 더 넘어야 폭포골이 나온다.

동화사골은 동촌서 출발해 수십리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지역의 휴양지 역할을 했다. 서민들이 수성-화원-동촌유원지를 찾을 당시, 그때 벌써 자가용 차를 가졌던 대구의 상류층 사람들은 이곳을 여느 지역 온천장 같이 이용했다. 동창골에서 자란 김씨는 이곳을 찾았던 유명인들을 숱하게 기억했다. 판사도 있었고 장군급의 군인도 있었다. 당시 대구 최대였던 모 백화점 사장도 손님이었다.

중환자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명한 약천이 지금의 '약수암' 바로 앞 동창골에 있었기 때문. 이들은 약물을 하루 한 말씩이나 마셔대며 황달이나 폐질환이 낫기를 기원했다. 요즘은 금당선원 쪽으로 더 가까운 곳에서 나는 물을 많이들 받아 가지만, 당시 이 물은 그냥 '새 약수'라고 불리면서 몸에 덮어쓰는 정도로만 사용됐다.

이런 휴양인들 덕분에 그곳에는 일찍부터 여관이 들어섰다. 일제 때부터 있던 것은 2개. 하나는 현재의 약사대불 전각 자리에 있던 '공산여관'이고, 하나는 약천에 인접해 있던 이름 없는 여관이었다. 이들 여관은 사실상의 휴양소여서 식사까지 제공했다. 절 경내인데도 여관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절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세를 받으려고 땅을 내놨기 때문인 듯 했다. 여관 외엔 동화사에 두부를 공급하던 집이 '동포막' '서포막'이라는 이름으로 동창골에 하나, 비로암 밑에 하나씩 있기도 했다.

김팔갑씨네 가족은 광복하던 1948년 동창골에 '약천여관'을 지었다. 동화사골 세 번째 여관. 하지만 휴양인은 갈수록 늘어 방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이에 1960년을 전후 해 동창골에 '태평여관'과 '봉서여관'이 추가로 세워졌다. 덩달아 인접 폭포골도 붐비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이미 상점이 생겨나더니 60년대엔 제법 상가까지 형성됐다.

휴양객 증가에는 좋아진 교통편이 작잖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53년쯤엔 동화사골 밑의 백안까지 시외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이어 1960년에는 동화사 일주문(봉황문)까지 노선이 연장됐다. 그곳 버스 종점에서 바로 연결되는 폭포골이 더 붐비게 됐다. 골 끝에서 주능선으로 오르는 도마재와 바른재가 인기 코스가 됐다.

이러는 과정에서 동화사 구간 도로 확장 사업이 진행됐다. 군사혁명으로 현역 대령이 대구시장을 맡던 시절. 준공식 날, 제막된 기념비를 보더니 대령이 기절초풍했다. 시장 공덕비였던 것. 권총을 빼들더니 누구 짓이냐고 참석자들을 다그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를 쓰러뜨려 땅에 묻었다. 그것도 역사이니 이제 발굴해 낼 때가 됐다고 주민들이 말했다.

하지만 세상 만사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동창골의 여관들은 1966,7년쯤 철거되기 시작했다. 불교 정화운동이 성공해 비구 스님들이 동화사를 인수한 지 10여 년 만에 경내 정리에 착수한 때문. 봉서여관 자리엔 대신 약수암이 세워졌다.

쫓겨난 사람들은 동화사 일주문 일대 개울가에 30여호나 되게 모여 또 한참을 장사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동화사골 밖 집단 상가지구로 옮겨 앉았다. 시내버스 노선도 1984년 2월 그곳까지 연장됐다. 동화사가 그에 발맞춰 서문을 만들었다. 인기 있는 등산로가 그쪽으로 옮겨졌다. 동화사골에 또 변화의 시기가 닥친 것이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동화사 포함한 동화사골 전경(왼쪽), 동창골의 모습(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