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발자취모음

[124차] 팔공산 (2006.11.12 일) 중마을 - 관봉 - 은해사

비로봉 2006. 11. 13. 14:45

 

- 산행일자 : 2006년 11월 12일 (일요일)

 

- 산행지 : 팔공산 관봉 ~ 은해사

 

- 함께 : 지호

 

- 산행경로 : 시설지구-용주암능선(산불감시초소)-관봉-노적봉-인봉-능성재-중암암-태실봉-영천 은해사


 

 

- 산행개요 :



 

 

노적봉의 태극기

 

팔공산(서봉, 동봉, 비로봉)

 

관봉

 

 

고소 공포증

 

주능선-은해사 삼거리 (능성재)

 

낙엽길


 

뒤 왼쪽 : 환성산,  앞 오른쪽 : 관봉

 

관봉, 노적봉, 인봉

 

관리가 안된 문화재(?)들(은해사 뒤 태실봉),,,,



 

정자 터

 

 

거북 등에도 무엇(비석 종류)인가 세워져 있었던 자국(홈)이...

 

인종대왕(1514~1545)의 태실은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조선 12대왕을 탄생시킨 태실의 위엄은 간곳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석조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있다.

태실은 태를 묻은 곳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를 몸의 일부라고 여겼고, 그래서 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의 태실은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졌다.

태실봉 정상의 인종태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귀농대(龜籠臺). 거북모양으로 가봉비(加封碑)의 비좌로 쓰인 귀농대는 비를 꽂은 귀부(龜趺)와 지대석을 깎아서 만들었다.
귀농대는 조각모양이 섬세해 조선 후기 석공예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좌로 쓰인 귀농대는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나 가봉비는 현재 반파된 상태로 이수를 포함한 윗부분과 비 아랫부분이 방치돼 있다.

가봉비는 그 크기나 이수 조각의 전체적인 설정이 매우 사실적이고 세부묘사가 뛰어나다.
화강암으로 된 비 전면에는 좌우의 용 두 마리가 가운데 있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양각돼 있다.
왼쪽의 용은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빼고 있고 마주보는 오른쪽 용은 입을 다문 채 이를 드러내고 있다.
비의 명문에는 거의 다 마멸됐으나 '인'(仁)자 하나만 확연히 드러나 있다.

다만 인종 사후 명종 즉위시 건립되었기 때문에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이라고 적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왕의 태실은 백성들에게는 신앙과 같이 신성시됐다. (매일신문 기사에서...)

 

 

신일지



 

은해사



제3회 은해사 주지배 족구대회








 

청통 은해사 입구

버스정류장 (버스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