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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윤정이의 숙제(대구의 문화재)

by 비로봉 2012. 10. 23.

 

효자 강순항 정려각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 (2000. 2. 29 지정)

소 재 지 : 동구 평광동 1180-5번지



동구 평광동 마을 앞 도로변에 남동향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는 '효자 강순항 정려각'은 조선후기의 인물인 효자 강순항(1745-183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효자로 정표한 것을 계기로 제작한 정려 현판 및 정려각이다.



▲ 정려각 측면

현판의 내용은 "孝子崇政大夫行同知中樞府事姜順恒之閭 崇禎紀元後四乙未十一月日"이고 정려각은 1830년(순조 30)에 그의 아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강순항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극빈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50여년간 부모에게 지극한 효행을 행하여 향리인들의 칭송을 들었다. 1816년(순조 16) 경상도 관찰사 이존수의 건의에 의해 통정대부에 임명되는 동시에 효자로서 포상을 받아 정려현판이 내려졌다. 이어서 1830년(순조 30)에는 崇政大夫行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이에 따라 그의 부인 및 조상 삼대가 각종 관직을 추증받게 되었다.


고 산 서 당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1984. 7. 25 지정)

소 재 지 : 수성구 성동 산22

서당은 서원 등과 함께 고려말에서 조선조까지 주된 사학의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되나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이며 특히 교육적 기능면이나, 그 수에서 보편화되고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다.

고산서당은 대구와 경산간 국도상에서 대구와 접경지점의 북쪽에 위치하는 성동의 서원골 야산 중턱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으로는 남천이 흐르고 있다. 고산서당이 언제 세워졌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퇴계 이황(1501∼1570) 선생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이곳에서 강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이미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산이란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1690년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두 사람의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개칭되었으나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강당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유림에서 강당만을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서당 뒷편에는 1872년 세워진 퇴계, 우복 선생의 강학을 기념하는 유허비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 (1990. 12. 15 지정)

소 재 지 : 중구 남산동 219-3

이 건물은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Florian Demange(안세화) 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신학교 건물이다.

1912년 안세화 주교는 신학교 건립을 위하여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신부를 초청하여 건립계획을 세우고 세계 각 지역에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해에서 익명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도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이었다 한다.

이 건물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건축양식과 함께 벽돌제조 및 조적기술을 대구부민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풍에 준하는 비교적 순수한 서구식 건물로 벽돌의 조적이 정교한 우수한 건물이다.


독 무 재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1989. 6. 15 지정)

소 재 지 : 수성구 만촌동 188-1

독무재는 하효자 정려각과 함께 수성구 만촌동 청기와 주유소 뒤편에 있다. 이 독무재는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묻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한 선비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하시찬은 일찌기 당대의 석학이던 김경호, 송성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향리인 대구 효목동에 독무암루란 재실을 지어 기거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구에 부임해 오는 관찰사들과 제자들로 부터 수차에 걸쳐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팔예절요 2권을 저술하여 예학을 집대성하였다. 독무재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와 유림들이 독무암루가 있던 자리에 건립한 건물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도시계획에 의해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정면 6칸, 측면 1칸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박공 양측에는 태극을 그린 풍판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반칸의 퇴칸을 두었다. 기둥머리 부분은 봉두고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대구 시내 고건축물 가운데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수릉봉산계 표석

지정종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 (1995. 5. 12 지정)

소 재 지 : 동구 용수동 산6

팔공산 수태골에서 바윗골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약 1㎞정도 가면 우측편의 공지상에 수릉봉산계라는 명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바위는 화강암의 자연석으로 정면에서 볼 때 부정형 삼각상이며, 명문이 음각된 곳의 윗면은 튀어나와 자연적인 갓의 형태를 하고 있다. 명문은 길이 100㎝, 폭 65㎝의 범위에 '수릉봉산계' 5字가 음각되어 있다. 음각된 명문은 행서로, 수릉봉산계가 2열의 종서로 배치되어 있으며, 마지막 '계' 자는 종서된 두 글자의 중앙부분에 위치한다.

수릉은 조선왕조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릉이고, 봉산은 산의 출입을 封한다는 뜻이다. 이 표지는 집단시설지구 입구에 있는 '수릉향탄금계' 표석과 동일한 의미로, 이 일대가 봉산으로 지정된 보호림을 말해주는 명문이다.

수릉에 사용되는 향탄을 생산하기 위해 이 산을 봉산으로 지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두 표석은 서체의 크기나 규격이 비슷한 점으로 보아 동일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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