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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 정랑공파(正郞公派)의 유래와 파조(派祖), 예천 입향조(入鄕祖)

비로봉 2012. 10. 12. 15:21

정랑공파(正郞公派)의 유래와 파조(派祖)

 

 

함양 박씨는 조선 중기의 인재로 『향오린(鄕五麟)』『경팔립(京八立) 』을 자랑하는데,  

향오린(鄕五麟)이란 충좌(忠佐)의 후손인 눌(訥)의 아들 거린(拒麟ㆍ장령), 형린(亨麟ㆍ이조참의), 홍린(洪麟ㆍ대사헌), 붕린(鵬麟ㆍ한림사서), 종린(從麟ㆍ이조정랑)의 5형제를 말한다. 1533년(중종 28)에는 5형제 모두 문과 급제시킨 공으로 박눌이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경팔립(京八立)은 세영(世榮)의 네 아들인 대립(大立ㆍ좌찬성), 사립(思立ㆍ선무랑), 희립(希立ㆍ전서), 춘립(春立)과 세무(世茂)의 두 아들 소립(素立ㆍ지중추), 응립(應立ㆍ군수) 및 세옹(世蓊)의 두 아들 정립(정立ㆍ목사), 명립(名立ㆍ판관)을 일컫는다.

 

사촌(四寸) 이내의 친척간인 이들이 거의 동시(중종~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작게는 개인의 영광이면서 크게는 가문 전체의 광영(光榮)이기도 하였다.

 

특히 눌(訥)의 다섯째 아들인 종린(從麟ㆍ1496, 연산2년 ~1553, 명종8년)은 자는 자룡(子龍)이며, 금당실 사람 감천 문씨 문숙손(文叔孫,사용교위(司勇校尉) 문억경(文抑磬))의 사위이며, 퇴계 이황의 아버지인 이식의 처 외사촌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중종 27년(153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 수찬(修撰)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겸 문학(世子侍講院司書兼文學)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까지 벼슬이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侍讀官)을 겸직(1536년)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金安老)의 공포정치가 심하여 벼슬에 뜻이 없던 차에 김안로가 유배형 후 사사(賜死)되자, 1538년 벼슬을 그만두고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금당실마을)에 숨어서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으며,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入鄕祖)이며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파조(派祖)로 추원재(追遠齋)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이후 금당실의 함양 박씨들은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해 명문으로서 지위를 굳히게 된다.

※   금곡서원(金谷書院,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 함양박씨 8세조이자 문원공파의 치암공파 파조인 문재공 박충좌와 그의 후손인 행정 박눌, 남야 박손경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 추원재(追遠齋, 경북민속자료 제82호) : 박종린(朴從麟)을 제향하기 위해 1650년 증손 박영(朴瑛)이 용문면 상금곡리(금곡동)에 건립한 것이 추원재이다.

※ 감로루(感露樓, 경북유형문화재 제292호)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에 박종린(朴從麟)과 부인 문씨의 합장묘가 있고, 함창에서 예천으로 이거한 박종린(朴從麟)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그의 현손 박정시(朴廷蒔)와 박정설(朴廷薛)이 1600년대 건립한 재실의 부속건물이며, 함양 박씨(咸陽朴氏) 정랑공파(正郞公派)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형식 건물로 막돌쌓기한 기단(基壇)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위층은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을 설치하였으며 아래층은 마구간으로 사용하였다. 사방에는 화려한 모양의 난간을 둘러놓았다. 대청의 벽에는 당대의 명필 정윤목(鄭允穆)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뒤로는 희이당(希夷堂), 문간채, 외양간 등의 건물이 트인 ㅁ자로 배치되어 있어, 영남지방 재실 건축의 전형적인 배치로 평가된다.